하당 평화광장 앞 풍경 Seascape of Peace Square in Hadang region

2016. 3. 18. 15:59LANDSCAPE

하당(下塘)의 유래
하당은 무안군 이로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을 병합하여 상리라해서 무안군 이로면에 편입되었다. 1962년 11월 21일 동제실시에 의하여 목포시에 편입, 이로동의 관할이 되고, 1997년 1월 1일 상동을 상동, 하당동, 신흥동으로 분리하였다.
하당(下塘)과 당곶진(唐串鎭)하당은 목포 신도심 하당 초등학교와 하당동 사무소 부근이다. 극포영이 기록에 보면 <極浦營麗季海冠强梁創水軍處置使營今二老下塘之地是也> (邑誌) 당곶(塘串)은 곧 ‘땅꼬지‘로 현재의 하당부근이니, 고려말 공양왕대에 극포영(極浦營)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곶진(塘串鎭)으로도 불리웠다. 또한 창꼬지 또는 창꽃이라고도 했다 한다.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뜰망배 선착장 구실을 했으며 년 중 마르지 않는 성샘이 있었는데 수질이 좋아 일본인이 양조장을 세웠고, 광복후에도 삼학양조(1호광장 부근에 있었던 양조장)에서 여기서 물을 길어다 썼다 한다. 또한 웃동네(상리) 중화동, 큰 목 사람들의 식수역할도 하였다 한다.

한동안 침체됐던 목포가 서해안개발붐을 타고 새로운 기대주로 등장했다.


1897년 개항이후 중국대륙과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무역항으로 1940년대는 초반까지도 전국 6대도시 4대 항구였다. 하지만 중국이 1949년 10월 정권을 수립 후 모든 친미국가들을 적대국으로 외교단절 하고, 해방 후 일본과도 외교단절이 되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던 목포항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1979년 하당지구 매립한 45만평을 배후도시로 만든다며 시민들에게 택지로 평당 1만원에 분양했다가 5년 후, 1984년 계획을 백지화해서 말썽을 일으켰었다.
이 땅은 부동산붐과 함께 다음해 평당 2만원 안팎으로 전매되었다.
인구가 늘지 않고 동명동 기존택지도 제대로 팔리지 않아 신시가지 계획이 흐지부지되었었다. >>---신문기사 발췌 글


개항이후 90년 만에 정부의 서해안개발계획이 발표되면서 목포권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고 목포시 하당신도시는 무안국제공항과 신택지조성을 위해 시에서 추진한 사업이다. 1999년까지 택지사업이 완료되었으며 하당지구는 전남도청과 직선거리로 2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 국제공항 청사와도 가까운 것이 큰 이점이다. 2001년 기준 해당 택지 면적은 108만 6000평이었다 . 하당, 용해, 북항과 같이 1980년대 이후 형성된 신흥지역은 주거기능 및 상업기능 위주로 신도심이 건설되었다.
이외에도 영암과 해남, 무안으로 가는 국도가 나뉘는 분기점이 신도심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어 대불산업단지의 배후도시는 물론 인구 확보를 위한 기지로 건설됐다. 하당신도심은 바다와 접하고 있어 갓바위터널을 지나면 바로 갓바위 관광특구 내 박물관 시설과 접할 수 있고 바다 접안 일대에 지어진 평화광장은 하당의 제1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기존에  미관광장이던 것을 평화공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2명소 영산강하구둑의 오색 야경등을 바라보며 자전거로 하이킹을 즐긴다.  갓바위부교등 사이로 찰랑이는  물결소리가 정겹다. 평화광장 구조물의 야경등이 저녁분위기를 환상속으로 이끈다.  앞바다에 세계최초 바다분수를 설치하여 시원하게 뿜어내는 물줄기로 한 여름의 더위를 싹~ 씻겨준다.
하당의 제3명소는 2008년에 갓바위부교다. 이 다리는  평화광장과 박물관거리를 해안으로 연결해 놓았다.  다리를 설치하기 전에는 갓바위의 정면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젠 부교를 걸으면서 천연기념물 500호 갓바위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목포 하당에 전해지는 실화 하나

하당에는 호남선 철도의 부설로 생긴 언덕, 와우봉은 하당동사무소의 건너편에 있었다. 와우봉에는 큰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임성리의 일본송(任城里의 一本松)」이라 하여 목포에서 임성리로 들어갈 때 표지를 삼아 다닌 곳이었다. 1900년대 초 한국인 근로자들이 악질 일본인 후지끼(藤木弘助)라는 자를 구타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었고, 또한 후지끼가 삼향면에 사는 吳某라는 사람을 구타 후 살해하였다고 합니다.
병든 남편을 애타는 심정으로 바라보는 오경오의 아내는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빗 독촉하러 오는 후지끼 히로스케의 징그런 얼굴을 떠올리며 목화밭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열다섯에 시집와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으나 그것과 상관없이 빗이 늘어만 났습니다. 남편이 잦은 기침으로 병석에 누워있었지만 일본인 후지끼 히로스케는 오경오를 찾아와 돈을 갚으라고 무수히 구타하고 그를 수문으로 끌고 가서 수문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후지끼 히로스케는 썰물 때는 수문이 나오지만 밀물이 들면 그것이 물속으로 잠기는 것을 잊고 술을 마시고 잠이 들어버립니다.
저녁이 되어 오경오의 부인이 돌아와 남편을 찾자 후지끼 히로스케가 수문에 매달아두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을 때는 수문에 매달린 오경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경오의 부인이 죽은 남편을 등에 업고 후지끼 히로스케 집으로 갑니다. 오경오의 일가친척들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알게 된  吳씨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하여 후지끼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서 목에 걸고 이 길을 지나 경무서(초원실버타운 자리)로 갔다는 것이다.
일본영사는 후지끼 히로스케를 죽인 한국인을 철저히 조사하여 처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인을 살해한 오수민과 그 일가족에게 별다른 처벌이 없이 무마되었습니다.
양자가 모두 죽었으니 덮어 주자는 것이었지요. 그 과정에서 일본인 총순 구조명(친일인명사전 참조)의 역할이 매우 커서 조선인들이 총순구종명영세불망비(總巡具鍾鳴永世不忘碑)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발단과 절정은 신도심 하당에서 시작되었지만 결말은 목포시 죽동 초원빌라 담장아래 작은 비석에 새겨져 가슴 울리는 사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비석이 당시 가장 번화가인 본정통에 세워진 이유는 이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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